정부 정책에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이나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두 좌경이라고 몰아세우는 사람이나.
그 밥에 그 나물 동영상이네요.
6·25 특집으로 올리셨다니 그 얘기만 잠깐 합시다.
1.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었는데,
같은 패전국인 일본이 아닌 한국이 남북으로 분단된 이유.
이탈리아는 뭐~ㅋ
2. 나중의 월남에게처럼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주둔했던 주한미군이
1949년 6월 철수한 상황과 북한이 6·25를 감행했던 다양한 이유들.
cf.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미국의 정치/경제, 한국전쟁 전후 일본의 정치/경제.
아 짱나서 더 쓰기도 귀찮네.
프랑스군이 물러난 뒤 월남은 그렇다 치고
(월남 군사력 세계 4위 측정 기준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부하는 미군은 왜 월맹한테 패배한 건가요?
파병된 미군이 좌경화되서 그랬던 건가요?
역사를 좀 더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해 공부하셨으면 합니다.
아참, 그리고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 아닙니다.
현재 국방백서 상에도 우리의 주적은 '북한정권과 북한군'으로 한정해 명기되어 있습니다.
1. 전쟁의 승패보다는 이념의 대립으로 분단이 되었죠
2. 미국내 병력이 부족해서 우리나라에 파병온 군인들을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입장에서 보았을 때 자국의 안전이 우선시 되었을거라 판단됩니다.
3. 월남의 군사력의 기준은 당시 미군이 월남에 와있던 월맹의 남파공작원들의 공작으로 좌경화된 세력들에 의해 미군의 철수가 공론화 되어 미군이 철수를 하게 되는데 이때 미군이 철수하면서 월남측에 무기등을 남겨주고 가는데요 이때 그 무기들로 인해서 군사력이 4위가 됩니다.
4. 파병된 미군이 패배한 큰 원인중에 하나는 미군의 전술상의 특징이라고 볼 수있습니다. 이 때 월맹측은 게릴라전술을 잘 썻는데 당시 미군의 전술적 특징은 먼저 미사일등으로 적진에 공격을 가한뒤 어느정도 적군이 피해를 입으면 그때 보병을 투입하는 전술을 썼습니다. 그래서 월맹측에서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미군이 와서 미사일을 날릴때 피해있다가 다시와서 게릴라식으로 다시 공격하는 방법을 펼쳐서 미군이 많이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나라 국군의 경우 월남전에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그것은 625당시에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게릴라 전술에 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월맹군의 경우에는 대한민국 국군을 보면 싸우지말고 도망가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군인들도 우리나라 군인들에게 배우기위해 당시 배우러 오기도 하였습니다.
1966.두코전투.
베트남전에 파병된 한국군은 미군과 작전권을 두고 고질적인 마찰을 빚었다. 한국군은 직접 지휘하려는 미군에 맞서 자율권을 주장. 이 와중에 한국 기갑연대 제 3대대는 미군 아래배속, 그러나 미군으로부터 기관총이나 포탄보급을 전혀 받지 못하고 두코지역에 주둔. 어느날 밤, 3대대 9중대 기지를 목표로 적군 기습, 격전. 당시 한국군 주무기는 M1, 적은 AK로 화력에서 월등히 불리했다. 기습소식에도 밤 사이 폭우로 미군 헬기 및 포대지원도 불능, 다른 지역의 한국군과 미 사령관들은 모두 9중대의 괴멸을 예상...했으나...
이춘근 대위의 지휘하에 9중대는 밤 사이 격전에서 187명 사살, 6명 생포, 박격포 6문+대전차포12문+각종 소총/포탄 수백발 포획이라는 믿을 수 없는 전과를 올린다(참고로 아군 전사자 7명). 이 기적적 승리에 미군과 해외종군기자들은 경악, 전세계 언론에 대서특필.
1967.청룡부대의 전설.
짜빈동 지역에 주둔하던 청룡 11중대. 2월 15일 포병의 지원을 받는 적 3개 대대의 공격을 받음. 정경진 대위 휘하 청룡부대는 적의 침입을 사전에 인지, 만반의 준비를 하던 상황. 밀려드는 적을 섬멸하고자 포병의 지원하에 화력집중, 하지만 인해전술 앞에 중과부적. 진지 내 침입을 허용하고 육박전을 벌였다. 압도적인 수에 긴장한 여단장은 헬기로 지원부대 파견 명령, 정경진 대위는 아군 증파로 인한 포격지원 중단을 우려, 거절한다. 소총+수류탄+삽+곡괭이로 맞선 처절한 5시간의 혈전. 11중대는 수십배의 적을 압도하고 퇴각하는 적을 추격, 섬멸하는 경이적인 전투력을 과시한다. 전투 후 300여 명 사살(추정)+2명 생포+기관총 2정 획득+자동소총 17정 포획+소총 12정 포획을 이룩한 청룡부대. 전원 1계급 특진 및 미 대통령 부대 표창까지 받는다(아군 전사자 15명). 두코 전투와 함께 이때 전과는 워낙 유명해져 타 부대에서 청룡부대를 견학오는 일도 잦았다.
1967.오작교작전.
베트남 남북을 연결하는 최고 요충지, 닌호아+깜란+또이호아에는 1700명이 넘는 적군이 배치, 철통수비를 하고 있었다. 이곳은 중요 보급루트일 뿐 아니라 주변 25만명의 주민과 그들이 생산하는 물자를 확보할 수 있어 엄청난 가치를 지닌 군사요충지였다. 이 지역 점령을 위해 수많은 미군과 월남군이 침공했으나 번번이 패퇴, 결국 한국군이 투입된다. 미군은 한국군에게 작전을 간곡히 만류하지만...
한국군은 닌호아, 깜란, 뚜이호아 지역의 점령군을 남북에서 동시 공격하기로 결정. 북에서 맹호부대, 남에서 백마부대를 진격시킨다. 작전 개시된 3월 8일~4월 18일까지 이어진 전투. 차근차근 적을 섬멸한 한국군은 중간지점에서 합류한다(그래서 오작교작전). 한국군이 장비, 화력, 경험에서 열세임에도 위아래서 적을 압착시켜 괴멸시키고 미군보다도 적은 희생으로 월등한 전과를 올리자 미군은 이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군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작성했을 정도.